메뉴 건너뛰기

20200626_151843.png20200626_151750.png

20200626_151952.png

20200626_152114.png

 

초등학교 때도 그는 혼자였다. 아무도 그와 놀아주지 않았고 그의 신발주머니를 뺏어가 친구들끼리 돌려가며 달아났다. 그는 겨우 신발주머니를 찾아 집에 왔지만 시장에서 일하는 엄마는 늘 부재했다. 아버지는 회사로 갔고 역시 어린 초등학생이었던 오빠가 있었지만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

외로웠다. 10대 초반에 느낀 이 외로움의 감정은 오랜 기간 그의 의식에 남게 된다. 중학교 때는 달랐다. 그는 학교 전체가 알아주는 사람이었다. 친구들이 공부할 때 그는 아이들을 웃기기 위해 시나리오를 만들고 구상을 했다. 친구들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학창시절의 즐거움은 거기까지였다. 상고에 들어간 이후 드센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 그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지독한 공부벌레로 보인 그를 향해 친구들은 ‘재수 없다’며 멀리했다. 성적이 떨어질까봐 노심초사했던 그는 잠을 줄이며 공부를 했지만 그게 독(毒)으로 돌아왔다. 잠이 오지 않았고 길거리에 나서면 모두가 자기를 욕하는 것 같았다.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기말고사를 마친 그해 겨울 그는 아주대학교 병원 정신과에 입원했다.

다행이랄까. 급성 증상이 발현된 며칠 후에 한 입원 조치였다. 많은 이들은 자식이 정신적으로 아프면 절을 찾거나 교회를 가거나 점을 보러 간다. 그러면서 초기 치료 시기를 놓친 후 만성이 돼서야 겨우 정신과 병원 문을 두드린다.

고등학교 졸업 후 그는 한 작은 건축사무소에 들어가 일했지만 한 달 다닌 후 그만뒀다. 호르몬 이상이 생기고 먹던 약을 바꾸는 과정에서 재발했다. 당시 아주대병원 전문의들은 그를 성공한 치료 케이스로 불렀다. 거기에 대한 죄의식도 발생했다.

극단적 망상과 환청에 시달리던 그는 어느 날 4층 옥상에서 투신했다. 팔과 얼굴이 깨지는 부상을 입고 중환자실에 한 달 간 누워 있었다. 그때 누군가 울면서 눈이 벌게진 모습으로 그를 찾아왔다. 그가 아빠라고 부르던, 주치의인 이영문 교수(현 국립정신건강센터장)였다.

만약 지금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는 결단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혼자 고민하지 말고 주치의와 전문의 선생에게 자신의 고민을 얘기하고 문제 해결 방식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이후 그는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그야 말로 ‘인복(人福)’이 넘치는 인물로 사람 속에서 치유의 길을 찾았다. 그래서 그는 “제 치유의 제 일 순위는 인복”이라고 말했다. 10년차 설거지 일꾼으로 노인요양병원에서 일하고 현재는 용인정신병원에서 낮병원 동료지원가로 일하고 있다.



사람들은 묻는다. 어떻게 하면 회복될 수 있느냐고. 그런데 그 질문은 너무나 깊고 포괄적이어서 어떤 하나의 결론만으로는 해석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타자에 의지해 살아가는 존재인 만큼 슬픔과 상처도 사람 속에서 치유되어져야 한다는 것에 기꺼이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 치유 과정에서 함께 해 준 정신장애인 동료들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오랫동안 노동을 할 수 없었을 거라고 말했다.

따라서 치유는 혼자가 아닌 동료와의 협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삶의 전략적 포섭 대상이 바로 동료인 것이다. 그는 이제 조현병 25년차 삶의 ‘고수’가 됐다. 이성은(42·여) 씨를 만난 건 화창했던 지난 19일 수원 지역의 조용한 카페에서다. 다음은 일문일답.


이성은 씨 (c)마인드포스트.
-목소리가 크고 밝네요. 원래 그렇게 털털한 성격인가요.

“네(웃음). 굉장히 외향적이고 사람하고 어울리는 거 좋아하고 소통하는 거 좋아해요. 한때 증상으로 힘들고 우울했지만 극복해 왔어요. 지금도 회복 과정 중에 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어요.

동료지원가로서 예전에 내가 힘들었던 경험들이 당사자 동료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잖아요.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발병을 해서 지금 당사자 25년차예요. 좌절하고 우울했는데 고비고비를 넘기고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보니까 이전의 모습을 찾아가는 거 같아요.”

-살아오면서 가장 즐거웠던 시절이 중학생 때였나요.

“네. 최고였어요. 초등학교 때는 한글도 못 떼고 들어갔고 애들하고 어울리지 못해서 거의 혼자였어요. 왕따(집단따돌림)도 당하고 늘 놀이터에서 혼자 놀았어요.

그런데 중학교 올라가면서 외향적인 애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 친구들이 저한테 다가와주고 말을 건네주니까 저도 활발했어요. 애들이 공부한다고 책상에 앉아 있으면 저는 개그콘서트 작가가 돼서 어떻게 애들을 웃길까하는 대사를 짰거든요. 각본대로 애들을 웃기면 애들이 좋아하고. 친구도 많이 생기고요. 저 모르면 간첩이었어요. 중학교 때가 최고였죠.”

-어린 시절, 알코올중독자인 셋째삼촌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 삼촌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술을 안 마시면 매우 다정다감한 분인데 사람이 나쁜 게 아니고 술이 문제잖아요. 술을 마시면 180도 변해요. 폭력적이 되고 술심부름 시키고 숙제도 못하게 하고. 되게 힘들었어요.”

-반항 안 했어요?

“그런 건 없었어요. 그냥 웬만하면 술 드시면 피하려고 하고 어디 숨어 있으려 하고 했죠.”

-성은 선생님만 괴롭힌 거에요?

“아뇨. 집안 전체가 힘들었죠. 아빠가 장남이어서 저희가 삼촌, 고모들까지 해서 8명이 함께 살았어요. 아빠가 시집·장가 안 간 동생들을 부양을 했고, 뇌졸중인 할아버지도 같이 살았고요. 대가족이 살았어요. 아버지가 장남이니까 끌고 가야 했어요.”

-그 시간이 좀 힘들었겠습니다.

“힘들었죠. 엄마는 집안 형편이 안 좋으니까 시장 가서 장사하시고 집에 안 계셨죠. 할아버지도 뇌졸중이니까 자유롭게 활동을 못하고 집에는 거의 삼촌이 많이 있었어요.”

-어머니가 시장 가시면 저녁에 오시는 거 아니었어요.

“오시죠. 오시는데 초등학교 때는 학교 끝나고 오면 엄마랑 얘기도 하고 소통하는 게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으니까 외로웠어요. 삼촌이 힘들게 할 때 지켜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초등학생인 오빠도 어려서 나를 지켜줄 입장이 못 됐고요.

그래서 아빠가 결정을 내렸어요.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삼촌 빼고 우리 식구만 인천으로 이사를 갔어요. 아빠가 이러다간 가족 전체가 다 병들겠다 싶어서 이사를 간 거죠. 피해서 간 거죠. 그 삼촌, 술 때문에 돌아가셨어요.”

-어릴 때 그가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고 했습니다. 어떤 트라우마가 있었나요.

“술만 마시면 사람이 눈도 변하고 말도 막 해요. 어떨 땐 맞기도 했어요. 숙제하고 공부를 못하게 하고 친구들이랑 놀지도 못하게 하고. 삼촌이 잠들면 도망치듯 나가서 근처 아시는 분 집에 숨어 있다가 나중에 괜찮아지면 오고 그랬죠.”


이성은 씨 (c)마인드포스트.
-성은 선생님을 지켜주고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네요.

“거의 없었죠. 엄마도 힘들고 다 힘든 상황이라. 그래도 아빠가 나중에 큰 결단을 내려줘서 (삼촌과) 분리한 뒤부터 괜찮았어요.”

-아버지랑 어머니, 오빠는 성은 선생님을 어떻게 대했나요.

“힘든 환경이고 했지만 그 환경 안에서 최선을 다 했다고 생각해요. 삼촌 때문에 힘들었지만 계속 나랑 오빠 때문에 자리 이탈 없이 사신 게 헌신적이었어요. 가스 회사 다니던 아빠도 강하신 분이에요. 그런 걸 보면서 계속 이겨왔던 거 같아요.”

-초등학교 때 일찍 집단따돌림을 당했다고요.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었을 거 같아요.

“그냥 혼자 삭혔어요. 신발주머니 같은 걸 애들이 뺏어 갖고 지네끼리 그걸 갖고 뛰고 돌리고. 그러면 저는 그걸 찾으러 다니고 그래서 하교도 늦게 하고 그랬죠. 놀이터에서도 혼자 놀고. 혼자 많이 지냈어요.”

-저는 중·고등학교 때 공부도 못했고 친구도 없었거든요. 성은 선생님의 십대는 어땠나요.

“중학교 때 공부를 엄청 등한시 했어요. 연합고사가 있는데 공부가 안 되니까 수원이 아닌 타 지방으로 가야 했어요. 친했던 중학교 친구들은 공부를 잘 해서 수원으로 갔죠. 걔네들과 헤어지고 고등학교라고 가 보니 애들이 드세요. 그래서 안 되겠다. 공부만이 내가 살 길이구나 싶어 공부만 했어요.

그런데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하잖아요. 화장실 가는 시간만 빼고 공부만 하다보니까 애들이랑 전혀 소통이 안 되고 얘기도 안 하니까 재수 없는 친구로 보인 거예요. 제가 다닌 상고는 부기, 주산 자격증이 필요해요. 그걸 가르치는 학원이 수원에 있어요.



취업을 위한 필기시험 한 달 전이면 새벽 강의를 해요. 거길 쫓아다닌 거예요.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강의 듣고 다시 학교로 가고.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이 확 줄어버린 거죠. 학원 선배들이 제 얼굴을 보고 너무 좋지 않다고 할 정도로 피곤에 절어있었죠. 이런 시간들이 쌓인 거죠. 그러면서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기말고사를 볼 때 증상들이 나타났어요.”

-십대는 불운했다?

“중학교 때는 괜찮았고 고등학교 때는 너무 힘들었어요. 요새도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 못 하는 꿈을 계속 꾸고 있어요. 내가 학교에 적응을 못하고 결석하는 꿈을 꾸고 학교 가는 걸 불안해하는 꿈을 꿔요. 학교를 가야 하는데 결석해서 낙오돼서.”

-어느 교실에 들어가야 되는지도 모르겠고.

“맞아요. 그런 거. 학교를 갔는데 내가 어느 반인지도 모르는 거야. 계속 출석해야 되는데 계속 결석을 하고 친구들도 몰라. 그렇게 졸업 못하는 꿈을 지금까지 꿔요.”

-저는 대학 졸업해야 하는데 강의실이 어딘지 몰라서 헤매는 꿈을 자주 꿔요.

“비슷하다. 분명히 내가 몇 반으로 가야 되는데 몇 반인지 몰라(웃음).”

-대학교는 왜 포기하신 건가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아프고 일 년 휴학하고. 상고다보니까 대학 가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졸업하면 바로 취업을 해야 됐어요. 대학 갈 성적도 안 됐고 집안 형편도 좋지 않았어요. 바로 그냥 (취직했죠).”

-고등학교 1학년 때 첫 조현병이 발생했죠. 당시 상황을 좀 더 들려줄 수 있을까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중간·기말고사를 치면 처음에는 15등 했다가 다음에 6등으로 갔다가 3등으로 올라갔다가 막 이랬어요. 1학년 마지막 기말고사를 앞두고 애들 공부하는 모습을 보니 제가 등수가 밀릴 것 같은 불안감이 엄청 큰 거예요.

잠도 안 자고 공부를 하는 시간이 길어지니까 어느 순간부터 잠이 안 와요. 그럼 밤을 새고 학교를 가요.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강의 목소리가 제 귓가에는 벌레가 윙윙대는 소리로 들려요. 잠 못 잔 날들이 거듭되면서 완전히 뒤범벅이 되는 거예요.



길을 걸으면 모든 사람들이 나를 알고 있어서 내 욕을 하는 거 같고 건널목에서 파란 신호등이 커지면 신이 나를 죽이라는 신호다라고 생각했어요. 항상 맛있게 먹던 밥에서도 이상한 냄새가 나고. 세탁부가 세탁, 세탁하면서 오면 그 소리가 나를 죽이라는 신호로 느껴져요. 급성 증상들이 뒤범벅이 된 거예요.

기말 고사 치르고 겨울방학 때 증상이 확 왔고 부모님이 제 모습을 빨리 포착해서 며칠 안 가서 입원했어요. 지금도 감사한 게 암도 조기 발견하고 조기 치료하면 좋잖아요. 제가 급성 증상 있을 때 부모님이 바로 입원을 시킨 게 회복 과정에서 중요한 포인트가 됐어요.”


이성은 씨 (c)마인드포스트.
-다른 사람들은 발병하면 점 보러 가거든요.

“맞아요. 아니면 기도원 가고. 지금도 그래요. 저는 작은아버지가 아는 의사 연결해서 바로 입원했어요. 수원 아주대병원이 가장 컸고 잘 돼 있다는 소리를 듣고 1995년 1월에 입원했어요. 석 달 있었어요. 그때는 제가 증상 때문에 병원에 갔는지도 몰랐어요. 부모님이 데리고 가니까 나를 어디다 팔아넘기는 줄 알 정도로 현실 감각이 없었죠. 그때 이영문 선생님을 잘 만났죠.”

-첫 입원했을 때 주치의가 이영문 교수(현 국립정신건강센터장)였고 일할 기회를 준 분이 장명찬 한국재활시설협회장이었어요. 또 용인정신병원 낮병동 동료지원가로 일하게 해 준 분도 김성수 선생(현 새로운경기도립정신병원장)이고요. 인복(人福)이 참 많았던 거 같아요 .



“네. 김성수 선생님도 아주대병원에서 레지던트를 하셨어요. 제가 아주대 낮병원 다녔고 왔다갔다하면서 인사하고 그랬죠. 낮병원 캠프를 갔을 때 김성수 선생님과 같은 조가 됐고 장기자랑도 같이 짜고 그랬거든요.

그리고 제가 노인요양병원에서 일하고 김성수 선생님은 용인정신병원에 계시니까 출퇴근하면서 보게 되는 거예요. 용인정신병원 근처에 길 따라 내려가면 노인요양병원이 있어요. 가끔 만나면 인사하고. 장명찬 선생님은 제가 수원정신건강복지센터를 잠깐 다녔을 때 그때 거기 계셨죠.”

-인복이 많은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회복의 일 순위가 바로 인복이에요. 그게 첫 번째에요.”

-이영문 교수를 '아빠'라고 부르시더라고요.

“네. 제가 처음 아팠을 때 이영문 선생님 안 만났으면 지금의 제가 없어요. 그 정도로 그냥 제가 딸이죠. 자신의 딸이 아픈 양 돌보셨어요.”

-정신과 주치의를 아빠라고 부르는 경우는 흔하지 않아요. 이영문 교수를 아빠로 부르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언제나 내가 어느 상황에 있든지 항상 그 자리에서 똑같이 지지해주시고 응원해 주셨어요. 지난 25년 동안 항상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저를 응원해주시고 지지해주시니까 아빠로 부르게 됐죠. 이영문 선생님도 어디 가면 ‘우리 딸’이라고 소개하고요.”

-만약 이영문 교수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요.

“글쎄요. 그럼 지금의 제가 있었을까요. 회복의 첫 단추였어요. 첫 단추를 잘 낀 거죠. 만약 선생님이 없었다면 나는 더 아팠을 거고 더 장기간 입원해 있었을 것이고 더 방황했겠죠.”

-고등학교 졸업하고 작은 건축사무소에 일을 하다가 한 달 만에 그만뒀습니다. 직장생활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자신을 다치게 하는 행동을 했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4층짜리 옥상에서 뛰어내렸어요. 신기한 게 얼굴하고 땅하고 정면으로 부딪혔는데 다리는 멀쩡했어요. 얼굴을 많이 다쳤어요. 떨어지면서 얼굴뼈가 많이 나가고. 턱뼈 다치고 앞니 네 개가 다 나가고. 지금 의치거든요. 팔 양쪽 다 부러지고. 중환자실에 한 달 있었어요.”

-뭐가 그렇게 힘들었습니까.

“그때가 증상들이 다시 나타났을 때예요. 건축사무소를 한 달밖에 다니지 못했다는 자괴감도 있었고. 선생님들이 나를 아주대병원의 성공케이스라고 불렸는데 내가 의지도 약해서 한 달밖에 못 다녔냐는 실망감이 컸어요.

그 당시에 내가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먹던 약이 부작용이 생겨서 호르몬 이상이 온 거예요. 다른 약으로 교체했는데 그 교체하는 시간이 너무 힘들었어요. 그 약이 굉장히 안 맞았어요. 망상과 환청 증세가 다 나타나요. 증상을 알기 때문에 더 무섭잖아요. 증상이 찾아와 뒤범벅되고 일 한 달밖에 못한 자괴감, 부모님 도와드려야 하는데 이렇게 주저앉은 모습 때문에 힘든 걸 끝내야겠다 (생각했죠).

지금도 저는 그게 제일 후회돼요. 만약에 누군가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발벗고 말릴 거예요. 그리고 바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연계를 할 것 같아요. 그때 제가 응급 상황에 차라리 입원을 하고 선생님들하고 소통을 했으면 좋았을 거예요. 그걸 안 하고 혼자 짊어지고 얘기도 안 하고.”

-노인전문병원에서 10년 정도 조리실에서 설거지 일을 했어요. 돈을 좀 모았겠네요.

“(웃음) 사실은 형편이 좋지 않아서 집안에도 썼고 엄마도 건강이 안 좋으니까 이런 데 써서 많이 모으지는 못했어요. 엄마가 건강검진 받으러 가면 그때 드리기도 하고. 많이 못 모았어요. 모으는 중이에요.”

-스스로 벌고 싶은 돈의 액수가 천만 원대입니까.

“벌고 싶은 액수는 집 한 채는 사고 싶어요. 나중에 부모님 돌아가셔도 내가 내 명의로 된 작은 집은 하나 갖고 싶어요.”

-그럼 몇 억을 벌어야 하는 거겠죠.

“(웃음) 한 1억5천만 원은 있어야 되지 않을까. 집 사고 생활을 해야겠죠. 의식주 생활이 돼야 하고 내가 책 읽는 거 좋아하니까 그런 취미 생활도 해야 되고.”


이성은 씨 (c)마인드포스트.
-성은 선생님은 독립적인데 그렇지 않는 당사자분들이 많거든요. 경제력이 없어서 부모님에게 의존하는 사람들이 안타깝지만 많아요. 어떤 생각이 드세요.

“많은 이유로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서 회복의 여정을 가자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런 과정을 견뎌서 우리도 희망을 볼 수 있어요. 직업을 재활의 꽃이라고 하잖아요. 직업이 회복에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힘을 내서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도전하는 삶을 사셨으면 좋겠어요.

딱히 돈을 버는 일이 아니더라도 집에서 잠만 자고 활동을 하지 않는 분들은 힘을 내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낮병원이나 사회복귀시설을 통해서 생활의 리듬을 찾아가야 돼요. 내 목표가 학업에 복귀하는 거면 다시 학업을 이어갈 수 있는 노력을 해야 되고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노력을 해야죠. 계속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진행을 하는 거죠.”

-2015년부터 용인정신병원 낮병원에서 동료지원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주로 하십니까.

“말 그대로 당사자들과 함께 회복의 여정을 가는 거죠. 선생님들이 프로그램 진행도 하고 동료들의 차 모임이라고 해서 차 한 잔 갖다 놓고 주제를 선정해 편안하게 얘기를 나누는 시간도 갖고요. 그 시간의 목적은 자기 주장을 잘 펼 수 있도록 돕는 거죠.”

-거기에 전문의 선생들도 포함되는 건가요.

“아니요. 진행은 동료지원가가 하고 당사자 분들만 들어오는 자조 모임이에요. 많이 들어올 때는 15명 정도. 만약 정신과 선생님들이 사회기술훈련 교육을 한다면 저희가 코(co·협업)로 들어가서 보조 진행을 해 줘요. 질문도 하고 나의 이야기를 공개해서 이야기를 이끌기도 하고 독려도 하고 그러죠.

미술 프로그램에 코(co)로 들어가면 자리 세팅도 하고 도화지도 인원수대로 준비하고 색연필과 사인펜도 세팅해 놓고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고 있어요. 그 안에서 프로그램 진행도 하고 코(co) 역할도 하고 회원들과 상담도 하고 있어요. 하루 4~5시간씩 주 20시간 일해요.”

-급여는 만족하세요.

“일하는 시간에 주시는 거니까 (괜찮아요). 나중에 시간 늘리면서 하면 되는 거니까.”

-동료지원가 하면서 배우는 게 더 많을 거 같아요.

“회원들한테 많이 배워요. 저희가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는 관계가 아니고 상호교환이 되더라고요. 동료지원가들이 힘들어 하면 회원들이 와서 힘든 것들을 물어보기도 하고. 동료지원가 자체만으로 자신들에게 희망이라고 말해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롤 모델이 된다고 하죠.

처음에 낮병원에 다니기 힘들어 하는 회원이 어느 순간부터 자발적으로 잘 나오고 프로그램을 안 하려 하시는 분이 어느 순간 프로그램실에 먼저 들어와 있기도 하고요. 그래서 소감도 발표하고 점점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동료지원가로서 뿌듯하고 힘이 돼요.”

-자꾸 말씀드리지만 성은 선생님은 인복이 참 많은 거 같아요.

“많아요. 저는 신(神)이 저에게 정신질환도 주셨지만 정신질환이라는 큰 선물꾸러미를 주셨다고 얘기를 해요. 내가 증상을 앓게 되고 힘든 과정을 겪었지만 그 속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과의 인복이 선물꾸러미라고 생각해요. 저는 세상 살면서 가장 큰 복이 돈복도 있겠지만 다 떠나서 인복이라고 생각해요. 그 인복이 회복의 연결고리죠. 그 연결고리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고 많은 당사자들의 회복 연결고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주변에 친구들이 많은가요. 털털해서 주변에 사람이 많은 거 같아요.

“저는 아프고 나서 정신건강 시스템 안에서 만난 분들이 많아요. 고등학교 때는 발병해서 친구가 없었고 초등학교 때도 왕따여서 친구가 없어요. 그런데 친했던 중학교 때 친구들이 있는데 이들도 다 시집가고 애도 있고 해서 거의 못 만나요. 소통하고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은 당사자들이죠.”

-성은 선생님을 일으켜 세운 분들이 정신과 의사 선생님들이었나요.

“저는 많은 당사자들과 종사자 선생님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때 노인요양병원에서 힘들게 일할 때 같이 일하는 친구들의 격려가 없었다면 그 시간을 못 견뎠겠죠. 일도 제대로 빨리 못하고 설거지는 쌓이고 그러면 당장 잘릴 건데 동료들이 같이 도와주고 해서 5년을 견뎠고 설거지의 달인이 된 거죠. 그런 동료애가 있어요.

지금도 저 혼자 동료지원가를 했다면 5년차까지 못 갔겠죠. 저희 동료지원가는 3명이 협업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장기적으로 갈 수 있는 거죠.”

-어떻게 해야 우리는 회복이 될 수 있을까요.

“회복의 연결고리를 잃지 않는 것. 그게 제일 중요해요. 회복에는 오르막 내리막이 있어요. 내가 잘 지내다가도 힘들어지고 힘들어지다가도 잘 지내게 되는 거요. 오르막내리막을 받아들이고 갈 수 있는 거. 그리고 회복의 여정에서 '긍정적 위험'을 감수해야 해요.

내가 어떤 일을 도전할 때 다 긍정적 위험이 있잖아요. 새로운 일을 익혀야 되고 적응을 해야 되고 새로운 상사도 만나야 되고 동료도 만나야 되고요. 그런 긍정적 위험 감수를 해야 된다는 거죠. 직장을 갖게 되면 제 시간에 일어나서 직장에서 집중해서 일해야 되고요. 그런 긍정적 위험 감수를 잘 받아들이고 잘 해 나가야 저는 회복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성은 씨 (c)마인드포스트.
-인생을 어떻게 채워가고 싶습니까.

“저는 동료지원가로 오래 일하고 싶고요. 많은 당사자 동료들이랑 협업해서 회복의 여정을 같이 가고 싶어요. 또 당사자 분들이 일할 수 있는 공간이 확대됐으면 좋겠어요. 사실 장애인고용이라고 해도 신체장애를 많이 뽑잖아요. 그런 편견이 사실은 너무 싫어요.

왜냐하면 우리 당사자들이 충분히 일할 수 있거든요. 제일 중요한 건 당사자 혼자 가서 일하는 것보다 직장 자리가 2~3개가 돼서 동료가 같이 협업해서 일하는 게 장기적인 취업 유지를 하는 핵심 포인트라고 생각해요.”

-남자친구도 사귀고 싶을 나이잖아요.

“저는 모태 솔로고요(웃음). 아직까지는 남자친구 사귈 생각은 없어요. 결혼보다는 지금 저의 일이 너무 좋고, 집중을 해야 되는 부분이거든요. 제가 결혼을 하게 되면 잘 이끌어갈 수 있을까 생각을 해 봐요. 저와 다르게 산 사람과 만나야 되는 거고 새로운 사람과 만나 가정을 꾸리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 걱정이 되죠.

여자들이 결혼하게 되면 아이가 생기고 아이를 돌보다보면 어느 정도 구속이 있을 거 같아요. 지금은 한참 활동하고 일하고 싶어서 솔로가 편해요. 아직 결혼 생각 없어요.”

-가지고 있는 삶의 철학이 있을까요.

“열심히 살되 혼자 잘 사는 게 아니고 함께 잘 살자. 희망의 존재가 되자. 제 닉네임이 희망의 아이콘이거든요. 당사자로서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어딜 가든지 제가 많이 하는 말이 저를 소개할 때 당사자 25년차라고 하거든요. 연차는 경력을 얘기하는 거잖아요. 저에게 당사자로서의 경험은 경력이 됐어요. 당사자로서 경력이 쌓여가면서 당사자들과 회복의 여정을 끝까지 같이 가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성은 선생님은 충분히 고생하면서 살아왔어요. 고생은 선생님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많이 물어보세요. 저는 불변의 진리들이라고 얘기를 하거든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더라고요. 내가 열심히 하려고 하면 하늘은 도와요. 그리고 포기하지 않으면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설거지를 잘 못해서 늘보라는 별명을 5년 동안 달고 살았거든요. 그래도 여러 동료들의 힘으로 포기하지 않고 가다보니까 달인이 돼서 10년 동안 일할 수 있었던 거죠. 인내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고 포기하지 않으면 이룰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과제를 안고 살아요. 제 인생의 과제는 정신질환을 극복하는 것이죠. 그 과제들을 열심히 풀어나가는 게 저희 삶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생각을 갖고 살고 있어요.”

-정신장애 극복이라고 하셨는데 극복이 맞으세요. 치유가 아니고.

“극복이 맞는 거 같아요. 동료지원가로 일하면서 회복에 대한 생각도 변했어요. 예전에는 회복이라고 하면 정신질환 당사자가 갖고 있는 환청이나 망상 등 증상이 다 소멸될 때를 의미했어요. 그런데 최근의 회복 패러다임은 잔류 증상이 있어도 삶을 의미 있고 보람되게 사는 것을 의미해요.

아직 환청이 들려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낮병원 나와서 열심히 프로그램을 하세요. 망상이 있어도 열심히 일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잔류 증상이 있어도 우리는 의미 있고 보람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거죠.

저 또한 환청, 망상은 없어도 강박 증세는 있어요. 퇴근할 때 에어컨 한 끄면 다른 사람은 한 번 확인하고 끝내는데 저는 에어컨을 계속 쳐다보면서 확인을 해요. 강박 증상이 있지만 프로그램에 들어가서 열심히 일에 집중해요. 잔류 증상이 있어도 의미 있게 살 수 있어요.”


이성은 씨 (c)마인드포스트.
-성은 선생님에게 인간은 어떤 존재 같아요.

“함께 치유해 가는, 협업해 하는, 의지해 가는 존재.”

-나이 70세쯤 되면 어떤 삶을 살고 있을 거 같아요.

“그때는 동료지원가로 일하고 있지는 않고 동료지원가로 일하는 사람들의 조언자의 역할을 하겠죠.”

-지금도 삶의 무거운 짐 때문에 괴로워서 울고 있는 정신장애인들이 많습니다. 이들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은가요.

“우리가 많은 경험들을 하잖아요. 증상의 경험도 엄청 힘든 경험인데 풍부한 경험을 한 거예요. 그래서 자신을 풍부한 경험을 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그런 경험 안에서도 잘 이겨나가고 회복을 길을 가고 있잖아요. 자신감을 갖고 갔으면 좋겠어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용인정신병원 이효진 이사장님, 장애인표준사업장 벗이 박찬호 대표님, 용인정신병원 낮병동 윤희경 센터장님, 동료지원가 길 이끌어주신 이숙희 선생님, 백석대 최명민 교수님에게 감사드린다는 말씀 꼭 드리고 싶어요."

출처 : 마인드포스트(http://www.mindpost.co.kr)

목록
제목 날짜
낮병원 이용안내 2020.06.09
[ 2023년] 먹거리와 함께하는 즐거운 설 잔치 1 < 만두빚기>   2023.01.19
[보도자료] 한국정신건강동료지원가협회 창립...“당사자들의 즐거운 인생 찾기 도울 것”   2023.01.17
[2023년] 스마트낮병원 겨울학기 프로그램   2023.01.03
[ 2022년] 여름학기 프로그램 안내 ( 7월 ~ 8월)   2022.07.21
[ 2022년] 3~ 5월 낮병원 소식   2022.05.27
[2022년] 봄학기 프로그램안내 ( 3월~ 6월)   2022.02.21
[2022년] 2월 낮병원 소식   2022.02.17
[2022년] 겨울학기 프로그램 안내 ( 1~ 2월)   2022.02.14
[2022년] 동료지원가 과정 개강 안내 ( 3월 개강)   2022.02.14
[ 커피바리스타 과정 ] 운영 안내   2022.02.08
[동료지원가 과정] 2021년 동료지원가 과정 모집 안내   2021.02.16
[ 프로그램 시간표 ] 겨울학기 프로그램 ( 1~2월)   2021.01.25
낮병원 이성은 동료지원가 인터뷰 - 마인드포스트   2020.06.26
2020년 여름학기 프로그램   2020.06.26
사회적 가치 실현을 위한 정신장애인고용모델 창출 협약 -의) 용인병원유지재단, (주) 그리니쉬 ,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경기동부지사   2020.06.26
봄학기 프로그램 안내   2020.03.30
2019년 용인정신병원 낮병원 송년회 "우리의 송년회는 따뜻했네"   2020.01.09
2020년 겨울학기 시간표   2020.01.09
1박 2일 캠프 안내 - 6/13~ 14   2019.06.07
2019년 5월 21일 MBC PD 수첩 - 해뜰날 방영분   2019.06.05
© k2s0o1d4e0s2i1g5n. All Rights Reserved